아내는 영어공부 중

Posted by jinoaction
2014. 8. 23. 16:12 생활의 발견/지혜와의 대화

상수역 근처에 자주가는 카페가 생겼다. GRUNGE. 두번째인데 느낌이 좋다. 미완의 천정과 돌벽을 그대로 노출한 컨셉의 이곳은 첫 방문 때부터 왠지 잘 될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만석이다. 이 동네의 카페들은 프랜차이즈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작고 아담한데, 적당히 넓은 공간이 제법 아늑하다. 형태와 높이가 다른 테이블과 의자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묘한 어울림을 만든다. 


아메리카노는 초등학교 실험실에서나 볼 수 있는 사다리꼴 비이커에 담겨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마시면 더 진하고 깊은 맛이 난다. 비이커의 주둥이 부분이 약간 밖으로 휘어 나와 잡으면 꽤나 기분좋은 그립감이 느껴진다. 다소 투박해보이지만 바닥과 약간 떨어져 있는 높이의 나무조각 받침도 뭔가 특별하다. 아내가 주문한 '플랫 화이트'는 여전히 정체를 모르겠다. 그치만, '플랫'이라는 단어가 주는 평온함이 오늘 토요일 오후의 햇살과 닮아 그저 좋다. 컵을 들어 살짝 맛보니, 라떼보다 약간 단 정도. 역시 모르는게 좋을 때도 있다.


아내는 영어공부 중이다. 정확히는 영단어 공부인데, 책에 있는 단어를 이어폰으로 하나씩 챙겨 들으며, 따라 읽는거다. 이런류의 반복 학습은 때때로 정신을 멍하게 할만큼 지루한데, 아내는 잘 참아내고 있다. 허리에 손을 얹고 꼿꼿이 세운 몸이 그것을 증명한다. 애쓰는 모습이 귀엽다. 아내가 입은 체크셔츠의 보라색 스트라이프와 보라색 책표지가 묘하게 겹친다. 그 묘한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늘 영어가 자신과 멀다 생각한다. 하지만 그 걱정이 또 책을 들게 한다. 약간의 걱정과 아쉬움이 기분좋은 긴장을 만드는 법이다. 그 긴장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게 한다.


오늘 아침 새롭게 시작한 슈퍼스타 K6를 보는데, 기억에 남는 문장. 

"시간은 꿈을 저버리지 않는다. 꿈도 시간을 배신해서는 안된다.-은하철도 999중' 

영어를 유창하게 지르고픈 아내의 꿈은 저 귀여운 인내의 시간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늘 그 꿈을 응원할 것이고. 


+ 아내에게 글을 보여줬더니, '플랫 화이트'에서 맘이 변해, '마끼아또'를 시켰단다. 속았다. 그렇지만 내 혀는 역시 믿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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