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지혜와의 대화: 3개의 글

노포에 들러

Posted by jinoaction
2015. 3. 22. 13:17 생활의 발견/지혜와의 대화



냉면이 먹고 싶어, 을지로 우래옥에 처음 들렀다. since 1946, 내 나이 2배의 노포다. 어두울 때 찾아 들어가니, 제법 헷갈린다. 허름해보이는 뒷골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용을 자랑한다. 저녁 8시를 넘어 도착했는데, 마당 주차장에 차들이 제법 많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만 봐도 제법 멀리서 왔다라는 판단이 설 정도로 찾아오는 곳이다. 로비에서 인사하는 스텝의 미소는 이곳의 긴 역사만큼이나 다듬어져있다. 서울에서 쉽게 만나기 힘든 미소에 기분이 좋아진다.


비냉과 물냉 한개씩 시킬까 했으나, 그래도 처음인데 대표 메뉴다. 이름도 묵직한 전통평양냉면 2그릇. 앉자마자 컵에 담겨 나오는 육수는 기대했던 달짝지근한 맛과는 전혀 다른 깊은 맛이다. 정확히 뭐가 깊은지는 내공이 부족해 모르겠다. 고기, 약재가 오묘하게 섞여 우러난 듯하고 결론적으론 자극하나없는 심심한 맛이다. 냉면도 이 육수겠구나하는 생각으로 아내의 얼굴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나랑 똑같다.     


오랜 시간 자극적인 맛에 휘둘렸던 탓에 심심한거다. 그 사람이 먹는 것이 곧 그사람이라는 말처럼, 성격도 그동안 즐겨 먹어온 음식대로 감정적으로 변한 듯 하다. 식사는 급했던 것 만큼, 하루도 급했다. 별 것 아닌 일에 감정을 앞세우고 금새 후회했다. 첫인상으로 서둘러 상대를 판단하고 쉽사리 외면한다. 진득하게 대화하기 보다 다음 시간을 계산하기 바쁘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 속에서 차분하게 중심잡는 법을 잊은지 오래다.   


그렇게 냉면을 한참 씹었다. 심심하니, 무슨 맛일까 더 알고 싶어 여러번 씹게 된다. 처음엔 심심했던 육수와 면발의 개성이 먹을수록 진하게 더해진다. 그렇게 먹으며, 여러 생각들이 스쳐간다. 식사할 때, 말이 많은 편은 아닌데 자연스레 대화가 이어진다. 음식, 서로의 성격, 교육관, 요즘 주변의 일들까지. 배부른만큼 풍족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일상은 바쁘게 흘러간다. 마음먹은 시간들을 좀처럼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다. 시간이 바쁜게 아니라, 내 마음이 바쁜 탓이다. 


"조용한 상태에서 찾아오는 정적은 정적이 아니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찾는 침묵이 진짜 정적이다"


호흡을 다스려보자. 천천히 내쉬고 천천히 들이마신다. 생각을 끊어 마음에서 오고가는 것에 집착하지 말자. 순간순간 매일 일상의 한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해보자. 


가끔 이렇게 노포에 들러, 차분히 식사해야겠다. 

'생활의 발견 > 지혜와의 대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기와의 전쟁  (0) 2014.10.01
아내는 영어공부 중  (0) 2014.08.23

모기와의 전쟁

Posted by jinoaction
2014. 10. 1. 22:34 생활의 발견/지혜와의 대화

모기와의 전쟁 중이다. 모기향 피우고 들어오지 못하게 대문도 닫는 것도 서두를 정도인데, 끊임없이 들어온다. 하루에 6~7마리는 내 손바닥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모기에게 연민이 느껴질 정도다. 어떤 때는 두렵기까지 하다. 언젠가 모기 떼들의 원혼이 한꺼번에 나를 위협할지. 


문제는 꼭 자는 새벽 시간에 활동을 시작해 잠을 깨운다는 점이다. 그 작은 윙윙소리가 잠을 깨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게 나에게는 안들리고, 꼭 아내에게만 들린다는 점이다. 모기 소리가 귓가를 맴돌기 시작하면, 아내는 일단 불을 켜고 잡을 태세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아내는 모기를 찾고, 잡는 건 내 몫이다.  새벽에 4번이상 누웠다 일어났다를 반복할 때도 있다. 벽에 붙어있는 건 물론이고 날아다니는 걸 잡는 것도 능숙해졌다. 동체시력도 향상된 듯 하다. 모기잡기 레벨업 중이다. 그야말로 전쟁이다.


한번은 화를 냈다. 너무 민감하게 그러는거 아니냐고. 그 소리 때문에 잘 수가 없다면, 귀마개를 사주겠다고. 푹자고 일어나는 것이 더 중요한 일 아니겠냐고. 모기들도 먹고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아내 왈, 그건 상황을 피하는 것일 뿐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란다. 무조건 모기 죽는 걸 봐야지 잠이 온단다.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렇게 오래 연예를 했건만, 내가 몰랐던 아내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때로는 당황스럽지만,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 둘다 대화를 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건 오랜 연예를 통해 익숙해진 습관같은거다. 몰랐던 서로의 모습은, 대화 속에선 그닥 문제 될게 없다. 앞으로도 그럴테지.


결론적으로 나는 다시 전사가 되었다. 본질을 해결하는 것이 맞다. 아내는 내 손에서 전사한 모기를 보면, 환호성을 지른다. 내가 최고란다. 하루에 한번씩 최고란 소리를 듣는게, 사실 묘한 쾌감이 있다. 오늘도 5마리는 잡은 것 같다. 그저 모기들이 날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활의 발견 > 지혜와의 대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포에 들러  (0) 2015.03.22
아내는 영어공부 중  (0) 2014.08.23

아내는 영어공부 중

Posted by jinoaction
2014. 8. 23. 16:12 생활의 발견/지혜와의 대화

상수역 근처에 자주가는 카페가 생겼다. GRUNGE. 두번째인데 느낌이 좋다. 미완의 천정과 돌벽을 그대로 노출한 컨셉의 이곳은 첫 방문 때부터 왠지 잘 될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만석이다. 이 동네의 카페들은 프랜차이즈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작고 아담한데, 적당히 넓은 공간이 제법 아늑하다. 형태와 높이가 다른 테이블과 의자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묘한 어울림을 만든다. 


아메리카노는 초등학교 실험실에서나 볼 수 있는 사다리꼴 비이커에 담겨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마시면 더 진하고 깊은 맛이 난다. 비이커의 주둥이 부분이 약간 밖으로 휘어 나와 잡으면 꽤나 기분좋은 그립감이 느껴진다. 다소 투박해보이지만 바닥과 약간 떨어져 있는 높이의 나무조각 받침도 뭔가 특별하다. 아내가 주문한 '플랫 화이트'는 여전히 정체를 모르겠다. 그치만, '플랫'이라는 단어가 주는 평온함이 오늘 토요일 오후의 햇살과 닮아 그저 좋다. 컵을 들어 살짝 맛보니, 라떼보다 약간 단 정도. 역시 모르는게 좋을 때도 있다.


아내는 영어공부 중이다. 정확히는 영단어 공부인데, 책에 있는 단어를 이어폰으로 하나씩 챙겨 들으며, 따라 읽는거다. 이런류의 반복 학습은 때때로 정신을 멍하게 할만큼 지루한데, 아내는 잘 참아내고 있다. 허리에 손을 얹고 꼿꼿이 세운 몸이 그것을 증명한다. 애쓰는 모습이 귀엽다. 아내가 입은 체크셔츠의 보라색 스트라이프와 보라색 책표지가 묘하게 겹친다. 그 묘한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늘 영어가 자신과 멀다 생각한다. 하지만 그 걱정이 또 책을 들게 한다. 약간의 걱정과 아쉬움이 기분좋은 긴장을 만드는 법이다. 그 긴장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살게 한다.


오늘 아침 새롭게 시작한 슈퍼스타 K6를 보는데, 기억에 남는 문장. 

"시간은 꿈을 저버리지 않는다. 꿈도 시간을 배신해서는 안된다.-은하철도 999중' 

영어를 유창하게 지르고픈 아내의 꿈은 저 귀여운 인내의 시간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늘 그 꿈을 응원할 것이고. 


+ 아내에게 글을 보여줬더니, '플랫 화이트'에서 맘이 변해, '마끼아또'를 시켰단다. 속았다. 그렇지만 내 혀는 역시 믿을만하다.







'생활의 발견 > 지혜와의 대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포에 들러  (0) 2015.03.22
모기와의 전쟁  (0) 2014.10.01